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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그 시절의 놀이 본문
그 시절의 놀이
전쟁의 그림자가 아물어 가던 1960년대 초, 도시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동네에서 나는 자랐다. 삶이 궁핍한 건 어른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배고팠고, 겨울이면 손끝이 터졌으며, 장난감 하나 없는 일상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때의 우리는 날마다 잘 놀았다. 그것도 아주 신나게, 온몸으로.
우리 가족이 답십리로 이사 온 건, 아버지가 선창산업이라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으신 게 계기였다. 동네는 크고 작은 세 개의 마을이 붙어 있어 얼기설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그중 비교적 ‘덜 가난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공장 뒤편에 위치한 ‘ㄷ’자 골목 안에, 열 평 남짓한 판잣집 40여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길 건너 개천을 건너면 진짜 가난이 있었다. 경원선 둑 밑, 생활오수가 흘러드는 개천을 따라 70여 호의 집들이 통나무 말뚝 위에 위태롭게 올라앉아 있었다. 집이라기보단 비바람을 피하는 덮개에 가까웠던,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웃고 살았다.
당시엔 마당 대신 밭이 놀이터였다. 신답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널찍한 배추밭이 바로 우리의 천국이었다. 배추를 수확하고 나면, 우리는 그 밭에서 놀았다. 배추 꼬랑지를 캐먹으며 땅을 파고, 아이들 서너 명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구덩이를 만드는 게 놀이의 시작이었다. 그 안에서 소꿉장난을 하기도 하고, 다툼이 나면 서로 머리채를 잡기도 했다.
계절이 바뀌면 놀이는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봄이면 종이연을 날리고, 여름엔 중랑천까지 뛰어가 발을 담갔고, 가을이면 마른 논바닥에서 자치기 판이 벌어졌다. 손등은 늘 딱지가 앉아 있었고, 글리세린을 발라두면 그 위로 먼지가 들러붙어 더 지저분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겨울이 오면 진짜 잔치가 벌어졌다. 도랑이 얼어붙는 날이면 우리는 썰매를 지고 나갔다. ‘미나리꽝’이라 불리던 얼음판은 우리의 스케이트장이었고, 가끔은 얼음이 꺼지며 메기를 잡기도 했다. 고무를 태워 불장난을 하다 코안이 새까매지고, 친구 머리카락에 불똥이 튀어 시큼한 단백질 냄새가 퍼져도, 우리는 웃었다. 그저 즐거웠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다. 어느 겨울날, 미나리꽝으로 썰매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친구가 휘두르던 썰매 꼬챙이가 내 왼쪽 뺨을 관통했다. 나는 한 손에 피 묻은 꼬챙이를 움켜쥐고, 다른 손엔 썰매를 든 채 울음을 삼키며 엄마를 찾아 골목을 달렸다. 그날의 흔적은 아직도 내 얼굴 가운데에 남아 있다. 보조개처럼 생긴 작은 흉터 하나가,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추억이라고 해서 모두가 따뜻한 건 아니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은, 어느 추석 무렵 과외 친구들과 함께 벌인 장난이었다. 화장실에 폭음탄을 던졌다가 사람이 다쳤고, 그 사실을 안 과외 선생님께 무섭도록 혼이 났다. 매를 맞아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그 날, 하늘은 그렇게 맑기만 했다.
지금은 선생님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이끌기조차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어른 누구나 동네 아이들을 훈계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이제 지나간 풍경이 되었다. 체벌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애정이 있었고, 질서가 있었다. 우리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마음은 그렇게 궁핍하지 않았다. 때론 어른보다 더 단단한 정신력을 아이들이 지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놀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배우는 과정이었고, 친구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세상이 교과서로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는 얼어붙은 도랑 위에서, 배추밭 구덩이 안에서, 썰매를 끌며 자연스럽게 익혀 나갔다.
이제는 사라진 골목, 철길 옆 판잣집, 겨울 썰매와 여름 중랑천. 그 모든 것들이 세월 속에 묻혀 있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서 살아 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고, 풍요로웠다. 가진 건 없었지만, 모든 걸 다 가진 듯 웃을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 이제는, 그 시절의 놀이가 그립다. / 60년대 답십리의 풍경과 추억 中에서
# 월간 좋은생각 7월호 특집 추억의 놀이 응모글,
"그래! 이런 분위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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